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도 궁전 (문단 편집) === 고대~중세 ===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에 가까운 곳에 교황이 거처할 관저의 필요성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하지만 당초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성 베드로의 무덤이 묻힌 "넓은 묘지 교회", 흡사 추도시설과 비슷한 용도로 기능하는 것이 중시되었으며, 인근에는 성직자들과 고위 관료들이 머물기 위한 수도원과 가옥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4세기에는 교황이 실제 기거할 거처로 로마 동쪽 끝에 [[라테라노 궁전]]이 세워졌다. 바티칸에 성 베드로 대성당과 붙어있는 주택의 건설은 5세기에 와서야 교황 [[심마코]](498-514)에 의해 시작되었다. 라우렌시오 이교(501년부터 506년) 사태가 일어난 와중에도 심마코는 공사를 계속 강행하여 대성당 옆에 주교관저(episcopia)를 완공하였다. 그 뒤에 상당한 시간이 지난 781년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지원으로 대성당의 주랑현관과 바티칸 언덕 사이에 있는 구역에 건물이 보충되면서 "카루리 궁전"(Palatium Caruli)이라는 이름의 궁전(palatium)으로 발전하였다. 교황 [[레오 3세]](795-816)와 [[그레고리오 4세]](827-844) 또한 추가로 건물을 지어 올렸다. 9세기에는 교황 [[레오 4세]](847-855)가 [[사라센]] 등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과 건물 단지를 주변을 에워싸는 성벽과 망루를 축조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이때 이후로 대성당과 인근 지역이 "레오의 도시"라고 불리며 사실상 독립된 구역으로 인식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1153)는 최종적으로 "도시"의 구성 부분인 새 궁전(palatium novum)을 세웠는데, 이 궁전은 심마코가 세운 주교관저의 한 부분을 증축한 것이었다. 이때까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황들은 대부분 라테라노 궁전에 머물렀으며, 사도 궁전은 로마를 방문하는 외국의 사절을 접대할 때나 사용하였다. 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재위 말엽에 로마의 정치 파벌들 간의 다툼이 격렬해지자 할 수 없이 레오의 도시로 옮겨갔다. 그는 행정기능과 성직자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에우제니오 3세가 지은 궁전을 확장한 동시에 레오 4세가 축조한 성벽의 제2망루를 높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BorAPL+Col+1_Leo+View+RivExp.jpg]] 레오의 도시 이후로 바티칸의 건축 사업은 교황 [[니콜라오 3세]](1277-1280) 시대까지 잠시 휴면기에 들어갔다. 니콜라오 3세는 선출된 지 1년 후에 궁전 건물을 추가로 건축하고 바티칸에 계속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궁전은 인노첸시오 3세가 높인 제2망루와 연결되면서 사실상 레오의 도시 내 요새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곡물 저장고와 물탱크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의 Cortile del Pappagallo의 위치 인근에는 네 모서리 기둥이 있는 작은 탑들이 조성되었다. 니콜라오 3세는 3년이라는 짧은 재위를 했기 때문에 palatium novum 공사를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의 북쪽 면 작은 언덕 위에 있는 거처(Mons Saccorum)를 요새화하였다. 니콜라오 3세는 또한 교황궁의 북쪽에 포도밭을 사들였는데, 이 포도밭은 나중에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 의해 벨베데레 안뜰이 들어서게 된다. 1377년 [[아비뇽 유수]]가 끝나고 [[그레고리오 11세]]가 아비뇽에서 돌아오면서 이후 교황들의 정식 거처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